| 제목: 교통사고로 인한 수술비 |
● 불행 중 다행
한 분수(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 위한 모임 상담국장)
2000년 10월경에 회사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라나는 사고 후 1년여가 지나 그 후유증문제로 상담소를 찾아왔다.
상황을 알아보니,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사장동생차를 타고 시내로 나와 차에서 내려 횡단보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였던 것이다. 이 사고로 라나는 오른쪽 무릎 관절 손상과 허벅지 인대 파열, 어깨 얼굴 귀 등에 찰과상 및 열상 등으로 인해서 사고지점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한 달, 큰 병원으로 옮겨 두 달 반 가량 입원하여 치료하였다. 퇴원하고 일주일 후부터 사고 당시에는 다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왼쪽 다리에도 통증을 느꼈으나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조금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만 했다.
퇴원 당일 보험회사와 합의한 합의서 내용에 따르면 750만 원으로 사고보상 일체를 대신하고 향후 1회에 한해서 수술비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 병실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 다쳤으면 한국사람은 보상금을 몇천만 원 받을 수 있다는 등의 말을 들은 라나는 보상금을 더 요구했으나 보험회사가 강제로 퇴원시키겠다는 등의 압박을 가해와 어쩔 수없이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합의서에 가해자의 수임인 겸 입회인으로는 라나가 일했던 공장 사장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라나는 자신이 가구공장 기술자라고 했는데 교통사고 후에는 다리가 아파서 힘든 일을 하는 가구공장에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잠시 제빵공장에서 일을 했으나 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이집 저집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친 오른쪽 다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왼쪽 다리의 통증도 낫지 않자 라나는 J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다행히 J병원 사회사업팀의 지원으로 수술을 받아 1개월 정도 입원을 하였고, 그 후에 또 입원하여 재수술을 받게 되었다. 처음 수술비는 전액 무료였으나 그 다음에는 60만 원을 라나가 부담하여야 했다. 이때 합의서 내용에 따라 J병원 사회사업실에서 보험회사에 수술비 지급을 요구하였으나 보험회사에서는 라나의 질환이 교통사고의 연장임을 증명할 수 없다며 수술비 지급을 거부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라나는 세 차례에 걸쳐 6개월 가까이 혼자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고, 1년 반 동안 일도 못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수입이 없이 병원을 들락거리는 사이 사고 당시 받았던 보상금은 약값, 생활비로 다 써버리고 상담소를 찾았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라나는 내게 보상금을 더 받을 수 없느냐고 했다. 한국인에 비해 볼 때 너무 적은 보상금을 받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내용이 좀 복잡했지만, 최초 치료병원에서 부상정도와 치료종결상황을 알아보고 보험회사와의 합의과정과 J병원에서의 수술내용을 확인한 뒤 보험회사에 추후 보상금지급을 요구하는 순서로 진행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먼저, 나는 라나와 함께 최초 치료병원을 찾아가 담당의사와 원무과장을 만나보았다. 담당의사는 당시 라나의 부상정도와 수술내용 등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병원 화재로 인하여 기록이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에 문서로 작성해 줄 수는 없다고 했다. 거기에 원무과장은 한 술 더 떴다. 그는 얘기를 듣자 마자 대뜸 퇴원할 당시 완치됐었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다른 사고가 있었느냐고 오히려 라나를 다그쳤다. 수술한 다리를 다시 수술했다면 원장이 수술을 잘못했다는 얘긴데 그럴 리가 없고, 왼쪽 다리는 퇴원할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분명 라나가 싸웠다거나 하는 다른 사고가 있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J병원 담당의사의 소견 역시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의 소견으로는 '외부충격으로 인한 손상임은 분명하나 이전 교통사고로 인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수술했던 오른쪽 다리뿐만 아니라 왼쪽 다리도 J병원에서 수술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부상정도가 증명되어야 하는데 기록이 없다면 무슨 수로 교통사고로 인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쯤 되고 보니 라나가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는 것을 병원을 통해 증명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두 번째 단계로, 보험회사와의 합의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합의서에는 가해자의 수임인 겸 입회인으로 라나가 근무했던 사장의 서명이 있었고 라나의 서명은 없었다. 이상했다. 사장쪽으로 연락을 해보았으나 사장은 당시의 가구공장은 그만둔 상태이며 현재는 베트남에 출장중이라고 했다. 보험회사쪽 말로는 라나가 한국어에 서툴어서 증인 겸 대리인으로 사장 서명을 받아둔 것이라고 했다. 사장부인과 통화를 해보고 라나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세 번째 단계, 합의서에 1회에 한해서 수술비를 지급한다고 했으나 현재의 다리통증과 교통사고와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으니 수술비를 요구하기는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보상금을 더 받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지인들을 통해 조언을 구했다. 몇 사람에게 상의해보았지만 모두 합의서 내용에 의하면 보상금도 더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물정과 관행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합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민사소송을 하는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의사들이 교통사고 연장후유증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리가 만무하니 소송에서도 승소하기 어렵다고 했다. 보험회사쪽의 말은 지인들의 조언과 다르지 않았다. 보상금이 본인과실(횡단보도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넘)부분과 600만 원 가량의 치료비를 감안하면 적정하게 지급된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보상금 산정시 미등록외국인의 경우 2년까지는 한국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지만 그 이후는 본국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산정한다고 하면서 그 계산대로라면 오히려 충분히 받은 거라고 했다. 미등록외국인의 보상금 산정기준까지 알고 있다니! 보험회사의 담당직원은 정말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나는 어떠한 보상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먼 타국에 와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하여 여러 달을 혼자 병실에서 보내야 했고 일을 할 수도 없었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대로 포기하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에 고민을 해봤지만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무대책이 상책이다.'
마지막 단계로, 당시 보상처리를 했던 보험회사 팀장을 만났다.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라나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솔직히 말해서 한국인의 경우에 비한다면 너무 낮은 보상금이지 않았느냐고. 라나의 처지를 이해해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라나의 상황을 들은 보험회사 팀장은 합의서 내용대로 보상금은 불가능하고 1회에 한해서 수술비를 지급하기로 했으니 수술비 명목으로 청구를 하면 보상금을 대신하여 지급하는 방법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J병원에서 2차에 걸쳐 수술한 진료비 영수증을 보내면 상급자 결제를 받도록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이 사실을 알면 병원 원무과에서 수술비를 청구할 것이 거의 확실하니 잘 해야 할거라고.
산 넘어 산이라더니 ! J병원에서는 무료로 수술을 해주었었는데 영수증을 발급해 주겠는가.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또 결론을 내렸다. 나름대로 호의를 보여준 J병원이니 이쪽에서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상의하는 것이 최상이겠다 !
라나 케이스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라나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J병원에서의 두 차례 수술도 사회사업실장이 발벗고 나서서 예외적인 혜택을 입도록 해준 것이었다. 나는 먼저 사회사업실장에게 상황을 얘기하고 원무과에서 영수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회사업실장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는 원무과장을 만나 거의 사정조로 부탁했다고 한다. 결국 550만 원에 해당하는 영수증을 받을 수 있었고 보험회사에 제출하니 보험회사에서는 2차 수술시 라나가 부담한 60만 원은 지급할수 없다면서 500만 원만 주겠다는 것이었다. 라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것만이라도 빨리 받아서 친구들에게 신세진 것 갚아야 한다면서.
라나는 지금도 가구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힘이 안 드는 일은 한국사람이 시켜주질 않기 때문에 다리가 아파도 참아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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