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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자료실_2007년도모음

작성자
nodong
작성일
2023-08-06 21:10
조회
135
워드프레스 내장 에디터 :





제목: 단속으로 해결못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정책-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2007.2.26)

* 이 글은 노동사회연구소 월간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2007.2.26)


석원정(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


여수 보호소 화재참사가 발생하고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번 화재참사는 사고 발생의 장소와 경위 및 결과, 희생자들의 면면 등이 한국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고, 이런 종류의 참변에 으레 뒤따르듯이 여러 가지의 반성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참변을 당한 사람들은 거의 다 흔히 ‘불법체류자’라고 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불법체류자는 아니지만 ‘취업이 허용되지 않은 직종’에 취업하였기 때문에 추방대상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통상 길어야 1주일 정도면 보호소에서 대기하다가 본국으로 추방당하는 일반적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와 달리 1개월∼1년 가까이 보호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보호소에 있어야 했던 이유 중 대부분은 한국에서 취업하다가 임금이 체불되어 그것이 해결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화재 희생자들의 이런 특성 때문에 이주노동운동권에서는 이번 여수 보호소 화재사건을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사용자에게 이주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는 고용허가를 주는 고용허가제’ ‘3년간 취업 후 귀국해야 하는 단기로테이션’ ‘강력단속을 통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감소’의 3가지 축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정책입안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축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책이 예상과 크게 달라짐으로 해서 다른 두 가지 축까지 흔들리고 있다.


외국인력을 도입하는 국가라면 어느 나라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안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없을 수 없지만 대개 전체 이주노동자 중 10-15% 내외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정도라면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토록 오랫동안 수없는 인권침해와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겪는 후 고용허가제를 도입하고서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2004년 12월 188,483명, 2005년 12월 180,792명, 2006년 12월 186,894명으로 전체 이주노동자의 50%에 육박하는 수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공급을 불러들이는 한국사회의 수요가 결정적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력난을 겪고 있는 사업주들은 저임노동력을 찾고, 고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힘든 청년들과 가족들의 더 나은 삶을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한국입국을 위해 지불한 돈과 미래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한 기간으로 3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고, 일단 출국하면 다시 입국하기 힘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한번 입국한 한국에서 계속해서 체류하고자 하고, 이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이 되어도 이들을 채용하고자 하는 사업주들은 여전히 있다.


이주노동자 상담을 하면서 상황파악 겸 호기심 겸하여 간간이 그들에게 귀국의사를 물어보곤 하는데,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잡힐 때까지 가지 않겠다’ 였다. 사실 미등록상태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귀국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것은 지원활동가로서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것이 된다. 그래도 확인의 뜻으로 물어보면 ‘돌아가면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답은 국적에 상관없이 나온다. 때때로 ‘몇 년’ 이라고 막연하나마 시한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처자식이 있다든지 하여 돌아가야만 하는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하여 취업하고 있는 합법체류자들은 어떨까.
사업주의 고용허가가 입국과 취업의 전제가 되다 보니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업주의 횡포는 끊이지 않고, 이는 불법체류에 대한 유혹으로 작용한다. 안정적으로 운용되지 못하는 고용허가제의 각 부분들 역시 불법체류를 부추기는데 기여하고 있다.
3년만 일하고 돌아가야 하는 단기 로테이션 정책은 결정적으로 이들을 불법체류로 유인하는 동기가 된다. 거의 100%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다시 입국할 수 있다면 귀국’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고용허가제로 일하다가 귀국하면 1년 후 다시 재입국할 수 있다’는 법 조항이 실제로는 시행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의 제도는 그럴지라도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흔든다. 한국으로 오려는 사람들이 줄지어있는 마당에 고용허가제로 재입국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이미 최초입국을 위해서 수백만 원의 비용을 부담하였는데 재입국을 위해 다시 그 정도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무엇보다 귀국하면 아무리 의지와 능력을 갖추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드니 귀국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최종 결론은? ‘아직 여유가 있으니 좀더 생각해 보겠다’는 정도가 가장 많은 답변인데, 그 말인즉 ‘그냥 있겠다’ 라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미등록노동자가 되면 이들은 그때부터 이주노동자들이 말하는 ‘불법사람’이 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 순간부터 이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진다. 최근 들어서는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상담소에 들렀는데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서 ‘그 동안 어디 아팠느냐’고 물었더니 ‘단속 때문에 야간에만 일하는데, 힘들어서 그렇다’며 씁쓸하게 웃던 어떤 나이지리아인, 산재사고를 당했음에도 산재보상보험법 적용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산재보험신청을 하겠다는 말에 ‘경찰 불러 신고하겠다’는 대꾸가 아주 쉽게 나오던 사업주, 체불임금에 대해 노동부에 진정했더니 노동부 출석시간에 맞춰 경찰을 부르던 사업주...
근로조건 역시 예전보다 열악해지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취업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적어도 근로기준법은 준수하고 있거나 노동부의 관리감독의 범위에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더라도 근로조건 개선의 길이 조금은 열려 있다. 그러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애시당초 합법의 영역을 벗어나 있게 되니 근로조건 개선의 길은 없다. 단지 그런 사업장에서 계속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미등록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선택의 범위가 넓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선택하는 근로조건이라는 것이 열악할 것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등록노동자로 일하는 게 힘들어요’ 하면서도 그 해결의 길로서 본국귀국을 선택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거의 없다. ‘돌아가면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체류와 취업이유이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한’ 한국에 체류하게 된다.


물론 미등록노동자 상태가 되는 순간 이들은 언제 단속으로 잡혀갈지 모르는 상태에 처해지게 된다. 말이야 ‘단속될 때까지 일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단속은 이들에게 자신과 본국가족들의 삶을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재앙이 된다. 한국에서의 삶이 순식간에 끊어져도 본국에서의 삶에 지장이 없다면 삶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연을 안고 있는 이들은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귀국을 거부’한다. 이런 이들이 단속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주하게 되고,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치기도 한다.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리면 보호소에서 일정 기간 수용되어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한국 땅에서 청산할 사항이 없다면 2,3일에서 1주일 정도 수용하고 귀국하지만, 청산할 것들이 남아있다면 그것들이 청산될 때까지 상당기간 수용되어 있어야 한다. 청산할 것들 중 가장 많은 것이 체불임금이나 임대보증금, 사기당한 돈 등 금품과 관련된 일이다. 이 금품들이 빨리 청산되면 좋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청산이 늦어지면 본인이 받을 것을 포기하고 출국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수용기간이 하염없이 늘어나게 된다. 받을 돈이 수십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면 누가 그 힘든 보호소 생활을 견디면서 기다리겠는가. 받을 돈이 수백만 원에 달하면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대졸자 임금이 대충 월 10여만 원 정도 된다는 몽골이나 네팔, 월 최저임금이 6만 원선이라는 방글라데시 같은 국가에서 1,2백만 원 정도의 돈이라 해도 엄청난 거액이 된다. 그러니 감옥 같은 보호소에서의 힘든 생활을 견디는 것이 그 돈을 포기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게 된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의 코리안 드림은 처음부터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순탄치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의 코리안 드림이 순탄치 않다면 그 대척점에 서있는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이 순조롭게 시행되고 있어야 할 텐데 어찌된 셈인지 이주노동자 정책도 순조롭게 시행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력도입협정을 맺은 외국과 한국 모두에서 브로커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일부 사업주들과 이주노동자들은 그런 브로커들의 도움을 받아 인력을 채용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고 체류한다.
3년간 단기 로테이션정책은 재입국을 기대하기 힘든 이주노동자들의 귀국거부로 아마도 이 땅의 이주노동자의 숫자를 늘려놓는 결과만 낳지 않을까 생각된다.
‘후리가리’식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미등록노동자들의 수를 줄이지는 못하면서 수많은 인권침해를 낳아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 이번의 여수보호소 화재참사가 포함되어 있고, 우리는 이와 같은 후진적인 사고가 앞으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외국인력정책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고용허가제가 실시되고 3년을 채우고 있지만 미등록노동자의 비율이 지속적으로 50%에 육박하고 있고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면 제도의 재점검이 필요해진다. 제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제도를 바꾸는 것은 당연하고 정책이 실패했다면 수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와 관련하여 한국사회의 어느 부분보다도 노동운동진영의 책임성 있는 관심이 요청된다. 등록, 미등록 여부를 떠나 이주노동자의 존재는 자칫 거대한 저임 노동력 풀의 형성으로 직결되어 한국노동자들의 근로조건에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제목: 이주여성과 노동권(2007.3.)


이주여성과 노동권


2007. 3. 27 석원정(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1. 늘어나는 여성이주노동자


한국에 있는 전체 이주노동자들 중 여성이주노동자들은 약 1/3 정도이다. 등록, 미등록을 포함하여 전체 이주노동자들 수를 현재 약 40여만명 정도로 보고 있으니 여성이주노동자들은 대략 12-13만명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주의 여성화’나 결혼을 통해 이주해온 여성들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비추어볼 때 여성이주노동자들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여성이주노동자들의 한국입국 경로는 다양하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농협중앙회 등이 주관하는 산업기술연수생, 해외투자기업 산업기술연수생, 예술흥행비자, 국제결혼, 그리고 2004년부터 정식으로 시작된 고용허가제에 의해 대다수가 입국한다. 그 외에도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하였다가 체류기간을 넘기면서 취업하는 형태가 있다. 이들의 입국경로는 남성이주노동자들의 입국경로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단지 국제결혼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경로가 더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여성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취업하고 있는 업종은 크게 보아 생산직, 유흥산업(성산업포함), 가정부, 식당, 다방, 여관 등 서비스업 등으로 나누어진다. 생산직으로 대표되는 노동현장(이삿짐센터 포함)에서 일하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 출신이다. 식당. 다방 등에는 중국동포들이 대다수이며, 필리핀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온 여성들의 경우 유흥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남성이주노동자들이 제조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여성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유흥산업이나 서비스업에의 취업이 용이한 점이 이들의 취업업종을 서비스업에까지 확장시켜왔다. 이들의 취업업종이 남성이주노동자들과 다른 양상을 보임으로 해서 이들의 작업조건이나 노동조건, 조건에 대한 인식수준 등도 남성이주노동자들과는 약간씩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조건은 여성이주노동자들이나 남성이주노동자들이나 차이가 없고, 오히려 몇몇 통계에서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이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대응해왔을까. 이하에서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짧은 이주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사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여성이주노동자의 실태


(1) 장시간 노동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길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2000년에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한 바 있는데, 이에 의하면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월 평균 노동시간은 남자의 경우 연수생이 272시간, 연수취업자가 290시간, 해외투자기업연수생이 228시간, 불법취업자가 240시간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성의 경우 노동시간이 한결같이 남성보다 더 길었다는 사실이다.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연수생이 292시간, 연수취업자의 경우 무려 310시간으로 최장시간을 기록했고, 해외투자기업연수생이 245시간, 미등록노동자의 경우가 243시간이었다.
실제 일선현장에서는 하루 10-12시간 노동을 제공하는 사례를 일반적으로 접하고 있다. 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접수되고 있다. 심지어는 주야 12시간 맞교대 작업이나 야간에만 작업하는 사례도 접수되고 있다.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지만 사정이 특별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또한 생산직이 아닌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가정부, 식당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역시 12시간이상이 다반사이다.
고용허가제가 실시되고 나서는 어떨까.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 중에는 1일 8시간에 종사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렇지만 대개 1일 10-12시간 정도 노동하고 있어 고용허가제 실시 이전과 비교하여 노동시간에 그리 큰 변화는 보이지 않고 있다.


사례) 몽골인 민희는 이제 겨우 22살의 어린 여성이다. 미등록노동자인 민희는 단속을 염려한 사업주의 지시로 야간작업만 12시간 전담하고 있다. 처음에는 24시간 노동-24시간 휴식의 시스템이었다가 1주일 단위로 주야간 맞교대를 하고, 그 다음에는 야간작업만 전담하였다. 이렇게 신체에 무리가 가는 작업시스템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민희는 늘 피로해하고 얼굴에서는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2) 저임금
고용허가제나 산업기술연수제로 입국하여 노동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모두 최저임금제(2006년의 경우 700,600원)가 적용된다. 두 제도 모두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주게 되어 있는데, 최저임금 이상을 주는 사업장은 거의 없으며, 간간이 고용허가제로 이주노동자를 채용한 사업장에서 최저임금을 약간 상회하는 임금을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차액은 그리 많지 않아 대략 50,000원 내외 정도의 차이이다.
임금 총액을 보면, 1일 10-12시간 가량 노동할 경우 월 임금은 90-100만원 가량 된다. 여기에 월 1회 정도만 쉬면서 노동할 경우 120-150만원 정도까지 임금이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주로 남성이주노동자들에게 해당되며 여성이주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월 150만원 정도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3) 산업재해
노동자들에게는 건강한 신체가 전 재산이다. 타국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건강한 신체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산재에 노출되어 있고, 그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어에 서툴고, 안전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신체는 사실상 무방비로 산재에 노출되고 있다. 산재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신체의 훼손으로부터 오는 비통함은 물론이고 당장 돈을 벌 수 없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경제적인 곤란함으로 극도로 힘겨운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주노동자를 고용했던 많은 사업주들은 ‘치료만 해주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때로 미등록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가 만약 법대로 한다면 자기도 법대로 신고해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고 하는 형편이다.
고용허가제로 취업한 경우, 합법체류자이므로 사업주의 협박은 쓸모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많은 사업주들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산재로 처리하기를 꺼린다. 산재로 처리하지 않아도 피해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장해가 남는 경우 장해보상금이라든가, 입원시 휴업급여라든가, 통원치료시 교통비 등의 문제들은 많은 경우 산재피해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산재사고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 많은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남성들과 똑같은 장시간에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에게도 산재는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한편, 안전한 작업장에 대해 여성이주노동자들의 의식은 의외로 그리 높지 않다. 2002년 외노협에서 여성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자의 50% 이상이 사고성 재해나 직업병에 대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하였다. 이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업종이나 작업에 투입되고 있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된다. 고용허가제로 취업하고 있는 경우, 산재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여전히 잘 모르지만 적어도 산재에 대한 개념과 산재발생시 어떤 법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4) 모성보호조항의 사각지대
여성 이주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모성보호조항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에 의해 보장되는 생리휴가를 제대로 사용하는 여성이주노동자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앞서의 외노협 실태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자 101명의 64.1%가 유급생리휴가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편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자 434명 중 11.8%가 한국에서 임신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출산의 경우 조사대상자 411명 중 11.4%가 경험이 있었다. 또 391명 중 4%가 임신중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2002년 외노협의 실태조사결과에 의하면 대상자 249명 중 14.5%가 임신의 경험이 있었다. 그런 한편 근로기준법상 보장된 ‘임신부의 경이한 업무로의 전환 요구’를 해보았던 경우는 11명으로서 매우 적었다. 또한 임신부의 건강검진에 대해 29%가 제대로 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채 작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유산을 경험한 15사례 중 절반 정도가 1주일이 채 안 되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연히 유산 후 작업에 복귀하였을 때 건강이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로기준법상 모성보호조항으로 설치된 연장근로의 제한, 야업금지 등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이라고 해서 주야 맞교대가 면제되지 않고, 연장근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심지어는 여성이주노동자에게 야간작업만 전담시킨 경우도 있었다.
고용허가제로 취업한 여성이주노동자의 경우, 근로기준법의 모성보호조항을 근거로 사업주에게 적절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사례) 몽골여성 아리오나는 현 사업장에 취직한 지 3개월만에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남편은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첫 아이였다. 아리오나는 1주일을 단위로 주야간 맞교대를 하고 있었는데 임신을 확인한 아리오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조금 있으면 임신이 밝혀질 것이고 그러면 회사에서 계속 근무하게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이 된 아리오나는 아이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5) 해고
노동을 해서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에게 해고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해고가 미치는 영향은 한국인노동자보다 훨씬 심각하고 즉각적이다. 거의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월 임금의 50-80%정도를 본국으로 송금하고 남은 돈으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해고를 당하는 즉시 저축해놓은 돈도 없는 이들은 정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진다.
이주노동자들의 해고는 한국인과 달리 어떤 사전경고도 없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근로기준법에는 해고조치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사유와 절차가 정당해야 한다. 사유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최소 30일 이전에 해고를 예고하거나 한달치의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이는 해고대상자로 하여금 다른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며, 그만큼 해고는 노동자에게 중대한 조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해고는 그렇지 않다. 사업주에게 반발하거나 근로조건에 불만을 표현하기만 해도 즉시해고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이런 해고에서 남녀의 차별은 없다.


(6) 사업장내 폭언과 폭행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폭언과 폭행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인들에게는 꽤 알려져 있다. 한국의 이른 바 현장문화는 거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런 문화를 처음 겪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당혹스럽고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사업장내 폭언이나 폭행은 여성 이주노동자들이라 해서 특별히 비켜가지 않는다.


(7) 그외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남녀의 숙소는 분리되어야 하는 등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제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거주하는 숙소가 안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 사업주에게 시정을 요청하여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회사측에서 이들이 한국남자들을 믿지 못한다는 식으로 대우하기 일쑤이다. 잠금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기숙사, 야밤에 한국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성폭행을 하는 경우, 문이 잘 잠기지 않는 샤워실, 안전하지 못한 숙소로 인해 불안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남녀 숙소를 분리해야 하는 근로기준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한 방에서 남자들과 같이 지내야 했던 사례도 있었다.


(8) 사업장내에서의 성희롱과 성추행
여성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남성들이 겪는 인권침해에 더해 성적인 측면에서의 인권침해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사업장내에서의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은 법적으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미등록노동자라는 자신의 불리한 처지 때문에 이를 법적으로 문제삼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입국, 취업한 경우, 연수업체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아 이 역시 공개적으로 문제삼는 것이 쉽지 않다.
여성이주노동자들이 당하는 성폭력의 가해자는 주로 한국인 사업주인 경우가 많지만 남성이주노동자인 경우도 발견되고 있다. 성폭력의 유형으로는 보여주기, 신체만지기, 강간 등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관리자가 사업장의 여성이주노동자들 다수에게 성추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앞서의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조사에 응한 520명의 여성노동자들 중 12.2%가 입국 후 강간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사례) 어유나와 아기라는 두 몽골여성은 사업장 변경과 관련하여 상담하러왔다. 두 사람이 사업장을 옮기려는 이유는 일상적으로 저질러지는 성추행때문이었다. 그 회사의 중간관리자인 반장은 작업중에도 여성들의 팔뚝이나 어깨를 만진다든지 등을 어루만진다든지 하면서 불쾌함으로 표시해도 중지하지 않았다. 성추행은 몽골여성만이 아니라 타국적 여성노동자 및 한국인 여성노동자들에게도 저질러지고 있었다.


(9) 자녀양육의 문제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에 의하면 많은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자녀를 한국에서 양육하고 있었다. 조사대상자 630명 중 한국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비율이 20.2%였다. 개중에는 자녀가 2명인 경우도 있었다. 이중 미취학연령의 자녀를 가진 비율이 응답자 104명 중 50.6%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미취학아동의 경우, 육아문제가 만만치 않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많은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자녀를 탁아소나 유치원 같은 곳에 맡기기보다 부모나 가족이 돌보고 있었다. 그 중 2.5%는 낮 시간에 자녀를 혼자 두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자녀 육아와 관련하여 여성이주노동자들이 가장 큰 애로를 느끼는 점은 비용부담이었다.


3. 이주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투쟁과 여성이주노동자


노동운동역사를 보면 여성노동자들은 항상 근로조건개선투쟁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주력업종이었던 전자, 섬유업종 종사자의 대다수는 여성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는 투쟁들을 전개하였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산업의 중심축이 중공업중심으로 옮겨가면서 노동운동의 중심축도 중공업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고 이후 남성들이 중심이 되는 노동운동이 전개되긴 했지만 현재도 여성노동자들이 주축인 업종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주는 투쟁의 의지는 거친 노동운동사에서 보석과 같이 빛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비정규노동자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한편 이주노동자 노동시장에서도 여러 조건으로 몇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이주노동자들 중 한국어와 한국물정에 가장 익숙하고 한국에 친지가 있는 중국동포들과 타국적 이주노동자들간에 차이가 있고, 남성 이주노동자들과 여성 이주노동자들간에 또다시 차이가 보이고 있다.
한편,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이론상으로 보자면, 여성이고 이주자이고 노동자라는 3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어 그 어느 계층보다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다. 그렇기에 열악한 작업조건에 대해 어느 계층보다 더 강렬한 저항의식이 요구된다. 그러나 향후 이주노동자 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몇 가지 사안에서 여성이주노동자들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이주노동 10년이 넘은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 자신들이 인권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하였던 사례는 크게 1994년 경실련 강당의 네팔 불법체류자 산재피해자 농성, 1995년 명동성당의 네팔 산재피해자 산업기술연수생 농성, 2002년과 2003년에 있었던 양산 D 타이어의 식대인상을 둘러싼 한족 해외투자기업연수생들의 파업, 2002년 포천 A가구의 체불임금으로 인한 9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의 집단 파업, 구로공단의 B사의 강제추방을 둘러싼 한족 해외투자기업연수생들 10여명의 집단 파업, 창원의 J회사의 임금횡령으로 인한 한족 해외투자기업연수생들의 집단 파업, 안산의 가족의 사망으로 인한 일시귀국을 둘러싼 파키스탄 산업기술연수생의 집단파업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중 1994년과 1995년, 2002년의 A가구의 집단파업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4년 농성으로 불법체류자에게 산재보상보험법이 적용되었고 1995년 농성으로 산업기술연수생에게도 근로기준법 8개 조항 적용, 산재보상보험법이 적용되게 되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집단적 여론이 형성되어가던 시점에 발생한 이 두 사건은, 그 처참함으로 인해 이후 한국사회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의 물줄기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리고 2002년의 A가구 집단파업사건은, 100여명에 달하는 이주노동자 모두가 불법체류자였다는 점, 상시 근로자 100여명이상을 채용하고 있는 중기업에서 발생하였다는 점, 불법체류자임에도 자발적으로 파업을 감행할 수 있었다는 점 등으로 인해 한국사회에 이제 ‘노동자로서의 이들의 권리보장’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이런 큼직한 사건들에서는 그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A가구의 경우,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10여명 정도 있었으나 이들은 파업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구로공단의 B사의 한족 해외투자기업연수생들 10여명의 집단 파업, 창원의 J회사의 한족 해외투자기업연수생들은 여성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B사의 경우 한국의 청계피복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연상시킬 정도의 격렬한 투쟁이었다. B사의 경우, 한국 굴지의 남성복 생산업체였는데, 한족 출신의 해외투자기업연수생들을 사실상 채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업조건과 관련하여 이들 중 일부가 노동부에 진정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회사측에서 노동부에 진정한 이들을 새벽에 기숙사로 난입하여 강제출국을 시도함으로써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여성이주노동자들은 기숙사 방문을 잠그고 버텼으며, 심지어는 알몸으로 버티면서 기숙사 2층에서 투신할 각오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촉즉발의 긴급한 상황에서 이 사실이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 알려졌고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이들은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문제는 공항 로비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회사측에서 미처 지급하지 않았던 임금과 비행기티켓을 전달하여 귀국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창원 J회사에서 있었던 한족 해외투자기업연수생의 경우, 한둘을 제외한 10여명이 여성이주노동자들이었다. J회사는 이들의 임금에서 월 15만원씩을 1년치나 강제로 공제하였으며, 공제한 이 임금을 은행에 입금하지도 않았었다. 명백히 횡령이었다. 또 산재를 당했을 때에도 치료비 중의 절반은 자비로 부담하여야 했었다. 이들은 어렵사리 회사를 빠져나와 근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 머물면서 농성을 하였다. 이 문제는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사업주와의 법정 공방에 중국영사관까지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위의 사례들에서 우리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저항의지는 남성들에 못지않게 결연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그간의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사례에서 공통되듯이 이들의 투쟁 역시 열악한 근로조건을 견디다 못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투쟁들이었고 각성된 의식으로 잘못된 제도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J사의 투쟁이나 B사의 투쟁에서 여성이주노동자들의 목표는 ‘허용된 계약기간 동안 무사히’ 취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왕 각성된 노동자로서의 투쟁의 첫걸음으로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 많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사례는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고용허가제로 취업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아주 간간이 자연발생적인 집단저항이 일어나곤 한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의 저항은 수시로 일어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사업장 변경이나 요구사항 포기로 귀결되는데, 집단적 저항은 대부분 요구조건 관철로 귀결된다. 적극적 의사표현으로 요구조건이 관철되는 것을 경험한 이주노동자들은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게 된다. 고용허가제로 취업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서 이런 적극적 의사표현과 요구가 이전보다 많아진 것은 왜 일까?
이는 일차적으로 합법체류자이므로 불법체류자와 달리 추방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한국입국전과 한국입국 직후에 시행되는 적응교육이 한국 노동부의 관리하에 진행되다보니 노동법에 대한 교육이 시행되고, 이것이 이들에게 ‘법적인 권리가 있다’는 자각을 갖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그 외의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지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합법체류자’라는 조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N회사에는 몽골여성-태국여성-베트남여성이 12명 일하고 있었다. N회사는 전달에 일이 없어 3일을 휴업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 달 임금을 지급하면서 그 3일치를 공제하였다. 이들 여성들은 입국시 받았던 교육에서 ‘회사측의 사정으로 휴업할 경우 임금의 70%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급을 받고 분개한 이들 여성들은 업무 시작 전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서로의 한국어실력이 워낙 짧아 깊은 논의를 하기는 힘들었지만 월급명세서에 공제되어 있는 금액을 가리키면서 ‘돈 줘, 일해. 돈 안줘, 일 안해’라고 가장 효율적으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1시간 동안 작업을 거부하였다. 각기 국적이 다른 이들 여성들은 회사의 큰소리에도 까딱하지 않고 1시간을 버티다가 돈을 주겠다는 회사의 약속을 받고 일을 시작하였다.


N회사 외에도 계약서에 명기된 대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부당하게 공제하는 것에 대해 12명의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결근하면서 관할 노동부 고용지원센터를 찾아가 민원을 접수하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M회사의 경우도 있다.


N회사나 M회사의 사례는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였다는 점과,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는 점, 요구조건의 관철 이후 계속 사업장에 근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이전의 산업기술연수생이나 미등록노동자들의 사례와 구별된다. 아직은 몇몇 독특한 사례로서 보고되고 있지만 향후에는 유사한 사례들이 더 많이 보고될 것이며, 이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상 한국의 여성이주노동자들의 노동실태와 이에 대한 여성이주노동자들의 대응에 대해 짧게나마 살펴보았다. 현재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는 고용허가제의 전면시행이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이전과 달리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는 아직은 정확하지는 않다. 2007년 8월이 되면서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고 3년이라는 하나의 사이클이 완성되기는 하지만, 그 동안 산업기술연수제와의 병행실시-거의 50%에 육박하는 미등록노동자들의 존재로 인해 고용허가제의 그 긍정적인 부분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부정적인 부분은 제대로 시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산업기술연수제가 폐지되고 고용허가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면, 고용허가제도의 정비 및 개선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여성이주노동자들은 기본적 근로조건의 향상은 물론, 이전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모성보호조항의 실질적 보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007년이 여성이주노동자들에게 명실상부하게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해가 될 수 있도록 여성계와 노동계의 적극적 관심이 요구된다.


 








제목: 다문화가정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사회문화적 과제(2007.9.7)

* 이 글은 의정부 콜로키움 토론회의 글입니다.


석원정(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2007.9.7)


발제문은 ‘다문화가족’이 내포하고 있는 몇 가지 층위에 대해 환기시키고 있다. 앞으로 다문화가족의 바람직한 안착과 지원,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색작업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발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결혼가정은 한국인끼리 이루어진 가정과는 다른 특수한 면을 많이 안고 있고, 각 측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 사회에서 국제결혼가정이 성공적 혹은 큰 무리 없는 가정의 한 형태로 인식되기 위한 사회적 작업 역시 유기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국제결혼가정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발제에서 다루지 않은 한국인여성과 외국인 남성간의 결혼은 발제문에서 다루고 있는 외국인여성과 한국인남성간의 결혼과 여러 모로 다를 것이다. 나이어린 외국인여성과 나이 많은 한국인남성의 가정보다 더 많은 문제점과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향후 다양한 측면에서, 또한 여기서 다루지 않은 다른 구성의 국제결혼가정에 대해서도 연구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2006년 전체 결혼의 11.9%인 3만 6,690건이 국제결혼이라고 한다. 전체 결혼 8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2000년 들어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국제결혼은 이제는 그리 신기할 것이 없는 결혼의 한 형태로 자리잡았다고 여겨지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의 국제결혼의 증가는 놀라울 정도여서 농촌에서 3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가진 외국인이 해마다 몇 만명씩 영구적인 한국인이 되기 위해 우리 사회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 해도 놀랍고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구성원으로 잘 받아들일 것인가가 연구과제가 되고도 남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2세를 이 땅에서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결혼이주자들과 그들의 2세는 새로운 한국인으로서 우리들 앞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집단을 이루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에 부딪히면서 우리 사회에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과제들은 우리들 당대만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무게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아래의 글에서는 결혼이주자 및 2세들의 사회적 특징을 매개로 이들이 우리에게 숙제로 내어주고 있는 과제들을 짚어보고 과제 해결방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1)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집단
결혼이주자들과 다문화가정의 2세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한국인들이다. 물론 이들과 비슷한 한국인들 혹은 한국인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한국인들이 있기는 했다. ‘매우 희귀한 귀화한 한국인’들과 혼혈인(적절한 용어가 아직 없으니 그래도 사용하기로 한다)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귀화한 한국인’들은 워낙 소수이고, 그리고 혼혈인들의 경우 워낙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에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주노동자의 한국유입이 시작되고, 국제결혼이 한국 유입 통로의 하나로서 더 많이 기능하였을 때에만 해도 국제결혼이 우리 사회의 주목해야 할 사회적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국제결혼 가정이나 그들의 2세들이 겪는 애로사항들도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되고 해결책이 찾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국제결혼이 급증하면서 상황은 달라졌고, 이들 ‘다른 한국인’들의 존재는 기존의 한국인들이 압도적으로 학습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았던 이데올로기인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 새로운 검토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처럼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의 등식이 형성되는 특수한 국가에서 드디어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다문화주의가 사회적 과제로서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지금, 민족주의를 지고의 가치로서 체화하여야 했던 일제 식민시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와 민족주의의 가해적 측면을 경계해야 하는 외국인주민 100만명(2%)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세대가 동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다문화와 관련하여 최근의 화두는 단연 이 ‘민족주의’일 것이다. 최근 들어 사회 여러 부분에서 ‘다문화’를 언급하고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가 있어왔다. 이에 불을 붙인 것이 최근 UN에서 언급한 ‘단일민족의 언급자제요청’이다. UN의 언급에 대해서 각 언론들에서 빠짐없이 이를 다루었고 사회 저명인사들 역시 다문화사회에서 단일민족을 강조하고 신봉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이데올로기는 아닌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미 불가역(不可逆)의 상황인 한국사회의 다문화사회로의 안착을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 할 징검다리가 민족주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적인 배척으로 귀결된다거나 역으로 무조건적인 선으로 인식하는 극단적인 자세는 곤란하다.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향후 심도있는 사회적 논의를 거쳐 재정립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솔직한 토론과 논의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민족주의는 다문화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가? 다문화주의에서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민족문화의 보존과 향유의 권리는 인정하고 권장되는데 이주국의 민족문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문화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재정립되어야 하는가 등 적극적이고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


한편, 결혼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의 2세의 증가는 민족과 무관하게 정치적 공동체로서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라는 또 하나의 과제를 우리 사회에 던져주고 있다. 이 과제는 먼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국가간 분쟁에 대해서 우리 국가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해나갈 것인가와 직결된다. 즉 매우 현실적인 과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보아도 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적으로 분쟁이 있었던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차세대들에게 교육할 것인가, 부모 중 1인이 몽골인인 가정의 아동에게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였고, 그에 완강히 저항하여 당시 패권적으로 영토를 확장해가고 있던 몽골에 당당히 맞섰던 삼별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재 혹은 미래에 분쟁이 있게 되는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아주 실감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현재 미국의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한미간 갈등에 대해 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미국가에 지고 있는 교포들이 그들의 정치적 공동체인 미국의 이익을 옹호한다면? 혹은 그 반대로 미국 정부에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는 교포들이 한민족의 건강을 위하여 한국의 이익을 옹호한다면? 그 각각의 입장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쉽지 않은 일이다. 역시 이에 관한 솔직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평범한 한국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중문화-이중언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집단


발제자도 언급하였듯이, 문화의 4가지 수용방향 중에서 자국문화를 유지하면서 이주국 문화를 수용하는 ‘통합’이 가장 무난한 방향이라고 모두들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를 통합시켜내야 하는 주체는 현실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문제는 결코 수월하지 않다.


이중문화를 일상적으로 접한다는 것은 식탁위에 놓인 다양한 반찬을 취향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자국문화의 어떤 부분을 어느 정도로 유지할 것인가, 이주국 문화의 어떤 부분을 어느 정도로 수용할 것인가부터 해서 자국문화와 이주국문화가 충돌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서로 수용하기 힘들고 이해하는 자세로도 문화간 충돌이 해소되지 않는 관습들은 어찌할 것인가 등 문화의 유지와 수용의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물론 문화간 접촉과정이 사람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기도 한다. 사고와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을 확대시켜나가기 위해서라도 상호간에 충돌을 야기시킬 것으로 예측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최근에 어떤 파키스탄인 남성이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다. 그는 한국인 여성과 혼인하여 한국국적을 취득하였다. 년이 지난 후 그는 한국인여성과 이혼하고 본국에 있는 사촌여동생과 혼인하였다. 그가 파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에 사촌여동생의 비자를 신청하였다가 한국대사관은 비자발급을 거절하였다. 이에 그는 사촌간의 결혼이 파키스탄의 오랜 관습(한국은 8촌 이내는 근친혼이나 파키스탄은 3촌 이내만 근친혼으로 보고 있다)이니 문화다양성을 인정해달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것이다. 이 사례는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가는 도정에 맞닥뜨릴 수많은 갈등을 예견하는 신호탄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우리의 법과 제도, 관습과 충돌하는 여러 사례들을 목격할 것이고, 그의 해결을 위해 고심해야 할 것이다.


결혼이주 1세대가 부딪히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떤 해결책을 찾는지,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다문화가정의 2세들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질 것이다. 가정에서 외국인배우자가 자국의 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의 문화를 잘 수용하였다면 2세는 덜 힘들게 다문화에 적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2세의 앞날은 그리 평온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평온하지 못한 다문화가정 2세들은 역으로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현재 급증하고 있는 국제결혼 통계를 볼 때 다문화가정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결혼이주 1세대들이 겪는 문화간 충돌을 합리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2세를 위한 방법이고 나아가 한국사회를 위한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외국인배우자에게 지속적으로 한국사회에 대한 정보와 습득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외국인배우자에 대한 한국생활적응과 적응도 제고가 각자의 가족 구성원의 의무로만 맡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 해도 성인이 되어 낯선 국가의 모든 것을 습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국적응과정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기여하는 사회적 협업의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인배우자를 포함하여 한국사회가 외국인배우자의 본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회적 협업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규 교육과정에서의 노력은 긴요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교과과정에서 유럽과 미국만이 아닌 아시아 국가들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아시아 국가들의 동화나 동요, 놀이, 그 외 여러 문화들을 접촉할 기회를 제공하거나 문화의 기본적 이해에 대해 학습할 기회를 마련하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과정에는 국제이해 과정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교육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콘텐츠들은 아주 부실하다. 교육콘텐츠에 대한 적극적 개발이 필요하다.
더 중요하게는 문화간 충돌의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문화간 충돌시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교육을 통해 체화해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우리의 전통적 문화와 정책, 가치관을 변화시키거나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는 집단


한국사회가 변화해가는 속도와 양상을 보노라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 동안 한국사회의 변화를 야기시키고 이끌어가는 요소는 다양했다. 산업화-고도성장-서비스산업의 비대-고학력-여성의 사회진출-저출산 등등. 그리고 여기에 국제결혼의 급증이 가세하고 있다. 국제결혼과 다문화가정의 증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놀라운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즉 외국인 여성배우자들에게 문화다양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거나 가정에서 이중언어나 이중문화가 허용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별다른 저항없이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 주장에 대해 반론이 제기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놀라운 일인가?
생각해보라. 외국인 여성배우자라 함은 시댁의 위치에서 보면 며느리이다. 그러니 위의 주장은 며느리의 친정문화를 인정해주고 시집도 며느리의 친정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배워야 하고, 손자녀 역시 외가의 문화를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인간의 결혼생활에 그대로 대입해보자.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남편과 시부모가 제주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며느리와의 소통을 위하여 그 언어도 배워야 하고, 손자녀에게도 그 언어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결혼문화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고 주장이지 않은가.
아마도 다문화사회에서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한국의 문화는 한국의 결혼문화, 남성중심-시댁문화 중심의 결혼문화가 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주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집단이 없으니 다문화가정으로 인해 여성차별적인 한국의 결혼문화에는 많은 변화가 올 것 같다.
이런 면을 생각하면 국제결혼의 증가와 다문화가정의 증가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데, 중요한 것은 다문화주의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존재할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사회를 논하면서 그 구체적인 양 측면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이 되지 않고 있는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문화주의를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공통의 기준(상식)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원만하게 유지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그치고 공통의 기준마련에 실패한다면 현재의 화교들의 모습과 같이 ‘방임과 차별’을 양산하든가, 아니면 일부 구성원에 대하여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소외현상이 발생할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4) 다수가 우리 사회의 하층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집단들


다문화가정의 2세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계층에 속하고 있나. 또 향후 성장하였을 때 어떤 계층에 속할 가능성이 높을까.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자들의 대다수가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코리안 드림의 완성은 자신과 한국인 사이에서 출산한 2세가 한국사회에서 주류로 편입되고 본국에서도 당당하게 대접받는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일 것이다. 이들의 꿈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애석하게도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경제적 양극화(는 정치적 양극화와 문화적 양극화로 이어진다) 상황을 볼 때, 그리고 많은 국제결혼가정들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2세들 중에서 이미 부모가 한국의 주류에 속해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하인즈 워드처럼 입지전적인 극소수의 아이들만이 한국사회의 주류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아동들은 모든 면에서 충분하지 못한 양육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하층민으로 편입될 것이다. 계층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곧 계급사회임을 뜻한다. 국제결혼가정의 2세들을 이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양산하지 않으려면 이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주어야 한다. 특히 교육의 기회는 중요하다.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정책과 능력개발정책들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제공되고 점검되고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제결혼과 그 자녀들에게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옮아가면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처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이들 다문화가정의 2세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임을 짚어둔다.
한시적으로 체류하고 노동을 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한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인 다문화가정의 2세들의 사회적 위치는 물론 다르다. 그렇기는 하지만 현재의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가 경제적 약자에 대한 멸시와 인종적 차별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보면 만연히 두어도 좋을 문제는 아니다. 이 땅에 거주한지 120여년이 넘는 화교나 혼혈인의 과거와 현재가 다문화가정의 2세들의 미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과 처우에 대해서 적극적 관심이 필요하다.
이상 다문화가정의 2세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사회문화적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간단하게 짚어보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사회의 변화는 우리들, 범인들의 인식 수준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이것을 주목해야겠다’고 주시할 때면 이미 우리의 곁에까지 성큼 다가와 있음을 발견한다. 결혼이주자들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관심이 모아진지 불과 2-3년, 어느 새 우리 사회는 그 ‘2세들’이라는 새로운 숙제를 떠안았다. 묵은 숙제를 말끔하게 마치고 새로운 숙제에 매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묵은 숙제와 새 숙제를 함께 푸느라고 고심해야 할 것 같다.


 


제목: 이주노동자의 작업환경실태(2007.12)


* 이글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특별수업 강의내용입니다.


2007. 12. 20 석원정(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


1. 이주노동자들의 한국 유입과 변화 양상


- 1988년부터 이주노동자 유입시작.
- 숫자급증 : 2007년 이주노동자 45만여명, 이중 불법체류노동자 23만여명
- 입국경로 다양화 : 관광비자가 주된 유입통로 - 노동비자 - 결혼비자
- 외국인력 도입제도 마련 : 해외투자기업 연수제-산업기술연수제-고용허가제-특례고용허가제(2007년부터 산업기술연수제 폐지)


2.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실태


- 주로 취업하는 사업장이 대부분 상시근로자 50인 미만의소규모 제조업
- 장시간노동 : 1일 10-12시간가량의 장시간 노동, 잦은 연장야간휴일근로
- 저임금 : 8시간 노동 기준 최저임금
- 노동강도: 업종과 업체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한국인보다 고강도의 노동에 종사, 때로는 한국인 2인이 할 일을 혼자서 하는 경우도 다반사.
- 작업안전성 : 업종과 업체에 따라 다르나 이들이 종사하는 업체가 대체로 유해위험사업장으로서 한국인에게도 그리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상황
-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노동자보다 더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 기계의 안전성 낮음, 안전장치 미비, 안전장구 미비
- 안전보건에 대한 인식부족, 직업병에 대한 인식부족,안전보건교육 부족
- 한국어 미숙, 산업사회 적응미숙, 한국문화 부적응
- 대부분 중소영세기업 종사자여서 정확한 실태파악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
- 그러나 2005년 안산 노말헥산 중독사건, 2006년 부산 DMF 중독 사건이 시사하듯이 폭넓게 유해환경에 노출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
- 2005년 노동부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2002-2005년까지 매일 7명씩 산재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남.
- 일반 건강관리 시스템에서 제외되어 있어
- 산업기술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들은 근로계약기간이 1년으로 이 기간 동안 사업장 변경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음. 이로 인해 산재가 의심되는 상황이나 산재가 명백한 상황임에도 사업주의 비협조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
- 불법체류자의 경우, 신분 불안정으로 산재 발생시 산재보상보험제도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경우들이 왕왕 발생.



3.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방안


(1) 사업장 근로환경 개선
- 기계 안전장치 정비, 안전설비 정비, 안전장구 지급
- 유해위험물질 관리 감독,분진-소음 등의 안전하지 못한 작업환경 개선
- 장시간 노동을 지양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 단축
- 중소 영세기업의 작업환경 개선에 정부의 적극적 지원 필요


(2) 충분한 산업안전교육 시행 및 안전대응능력 양성
- 작업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전에 충분한 안전교육 시행필요
- 업무의 유해위험 정도에 따라 일정 기간 작업 및 현장적응기간을 두고 충분히 적응할 수 있도록 할 것.
- 한국 입국전 본국에서 시행되는 사전교육에서 산업안전교육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송출국가와 협력체계를 갖춰 관리감독 필요
- 한국 입국후 시행되는 적응교육에서 현재 산업안전교육을 2시간에 불과, 교육시간 확대 및 내용 강화 필요
- 자국어로 교육이 시행될 수 있도록 외국인 전문강사 양성 필요


(3) 사업주 혹은 관리감독자에게 이주노동자 이해교육 시행
- 산업안전보건법상의 관리감독자에 대한안전보건 의무교육 연간 16시간을 규정대로 시행하도록 관리.
- 이주노동자 채용 사업주 및 관리감독자에게 이주노동자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적절한 산업안전교육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할 것.


(4) 기본 건강관리 강화필요
- 한국입국 전후한 건강검진을 충실히 하여, 기왕의 질환들이 업무에 따라 악화될 개연성이 있는 경우를 미리 알아내어 업무 배치에 참고하도록 하여야
- 기후-음식-불편한 주거-낯선 노동-심리적 불안정 등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될 경우 작업 적응도가 떨어지고 산재발생 우려가 높아질 있으므로 이에 대한 건강관리 및 생활상의 배려 필요


4. 고용허가제와 이주노동자의 산업안전


2003년 8월부터 새로운 외국인력도입제도로서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다. 고용허가제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몇 가지의 비판적 견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는 이전보다 분명히 향상된 측면을 가진다는 점은 사실이다.


고용허가제 도입이 이주노동자에게 미치는 가장 큰 의미는 ‘노동3권이 보장되는 노동자’로서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 취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에서의 삶에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78.9%에 달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불법체류자였던 때에 이주노동자들은 총체적인 측면에서 불편함과 불이익을 안고 있었다.


장시간노동, 저임금, 무방비로 노출되는 산업재해, 질병....이 중에서 산업재해와 질병은 ‘노동’하는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특히 산업재해는 이들이 주로 3D업종에 취업함으로 해서 사고성 재해, 직업성 질환 등 언제라도 이들을 급습할 수 있는 위협적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 불법체류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고작 위험한 사업장에 취업하지 않음으로써 산재피해의 확률을 낮추는 정도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고용허가제가 도입됨으로 해서 호전되고 있는가. 도입 3년차인 2007년의 상황을 보면,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진단하기는 어렵다. 고용허가제로 취업중인 이주노동자들에게서 여전히 예전과 같은 산재사고와 직업병이 발병하고 있고, 산재보상보험법의 적용에 대해 사업주들은 여전히 불편해 하고 있으며, 산재보상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은 일정정도의 금전적 및 시간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불편함과 고통을 겪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동안 합법적인 법의 테두리 밖에서 존재하면서 소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나 몇몇 선량한 한국인들의 온정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인 원리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 첫 걸음이 된다는 점에서 고용허가제 도입은 이들의 상황을 이전보다는 호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이나 제도가 마련되었다 해서 자동적으로 현실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므로 마련된 법적, 제도적 근거에 터 잡아 이주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으로 바뀌어질 수 있도록 현실의 문제점들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일일 것이다.



5. 사례모음


⧭ 안전장치 혹은 안전장비 미비
사례 1) 2005년, 플라스틱제조회사에서 일하던 네팔인 00씨는 플라스틱 제조기계에 장갑이 빨려 들어가면서 손가락-손-팔-어깨근처까지 빨려들어갔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기계를 정지시켰지만 이미 팔의 뼈와 살은 부서지고 없어져버렸다.


사례 2) 2005년도에 한 파키스탄 노동자는 불을 다루다가 불길이 얼굴에 닿아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화상을 입은 부위가 그리 넓지 않고 심하지 않아 가볍게 치료를 하고 다시 작업에 투입되었다. 작업에 투입되고 얼마 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꽤 넓은 부위에 화상을 입었다. 두 번이나 화상을 입었지만 두 번 다 안전을 위한 마스크는 착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두 번째 화상이 다 치료되지도 않았지만 사업주는 작업할 것을 종용했다. 똑같은 업무였고 이번에도 안전마스크는 없었다. 그러자 이 파키스탄 노동자는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를 찾아왔는데 그때까지 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원단체에 원한 것은 산재보험처리도 아니었고, 작업장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불길이 얼굴 가까이에 오면 고통을 느끼니 다른 업무로 바꾸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 안전교육의 부족
사례 3) 카자흐스탄인 00씨는 작업에 투입된 지 1시간만에 기계에 손이 끼여 산재를 당했다. 한국어는 전혀 하지 못했던 00씨는 기계작동법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장시간노동
사례 4) 카자흐스탄인 00씨는 불법체류자이다. 그의 근무형태는 12시간 맞교대제. 그런데 회사가 일이 바쁘면 쉬어야 할 12시간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어느 날, 12시간 정상근무를 한 후, 연장근로로 12시간을 근로하고, 그리고 이번에는 정상근무 12시간을 하게 되었다. 즉, 무려 36시간을 연속근로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36시간을 연속근로하다가 그는 기계에 손이 끼어들어가 사고를 당했다.


⧭ 은폐되는 산재
사례 5) 2006년 4월, 몽골인 00씨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는 몽골인-중국인-태국인 노동자가 생산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 회사는 생산직 노동자는 모두 이주노동자로 하고 있었다. 00씨는 작업도구가 망가지면서 작은 쇳조각이 손가락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부상을 당했다. 피가 쏟아지자 병원으로 갔지만 병원에서는 간단한 치료만 해주고 아무 이상없다고 했다. 그러나 1달여가 지나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00씨가 자비를 들여 다른 병원에 가서 x-레이 촬영을 해보았더니 쇳조각이 왼손 식지 세째마디에 박혀있었고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후 00씨는 3일간 일을 쉬어야 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일상적으로 심심찮게 작은 사고들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사업주는 산재처리를 하지 않았다. 산재처리는 고사하고 치료비가 소액이 나올 경우에는 본인에게 부담시키고, 고액이 나올 경우에는 사업주와 본인이 함께 부담하게 했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사업주는 ‘본인이 실수한 거라서...’라고 말하면서 치료비를 부담하게 했고, 사고 후유증으로 며칠 쉬게 되는 경우에는 꼬박꼬박 임금을 공제했다. 00씨는 다른 경우들도 그러했는데 본인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걱정이 되어 상담소를 찾아왔다.


⧭ 치료비도 자비로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사례 6) 2006년, 가나인 00씨는 작업중에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렸다. 회사는 00씨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치료를 받게는 하였지만 산재보험도 의료보험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 00씨의 치료비를 제때 지불할 수가 없었다. 00씨에게는 산재보험적용을 하지 않는 대신 휴업급여도 70% 지불하겠노라고 약속은 하였지만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00씨가 병원까지 가지 위한 교통비조차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미 치료기간이 한달이 넘어간 00씨는 가지고 있는 돈도 다 떨어졌고 때로는 교통비가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때도 있었다.


⧭ 치료 후 같은 작업에 종사하다가 똑같은 산재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다.
사례 7) 2002년에 한 이란인이 프레스에 손가락 1/2 마디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치료가 끝난 후 그는 똑같은 업무에 종사했고 작업 복귀후 얼마후 이번에는 반대쪽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사례 8) 2003년에 한 가나인이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다가 무거운 짐이 떨어져 발을 다쳤다. 한의원에 다니는 등의 치료를 한 후 그는 역시 같은 일을 했고 또다시 똑같은 사고를 당했다. 이번에는 다리를 다쳤다.


⧭ 직업병이 무언지 모르는 인식 부족
사례 9) 2003년, 한 이란 노동자가 체불임금 때문에 지원단체를 찾아왔다. 그가 원한 체불임금은 해결되었고, 그 과정에 얘기를 나누다가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 종아리의 혈관이 튀어나왔다는 것이었고 아프다는 것이었다. 바지를 걷어보니 종아리 전체에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혈관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일은 하루 종일 서서하는 일이었고,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검사를 해보자고 했지만 그는 귀국해서 치료하겠다며 거절했다.


사례 10) 2002년 인천에서 페인트 도장작업을 하던 한 노동자가 천식에 걸렸다. 일을 시작한지 불과 6개월만에 발병하였고, 아주 심했다.


사례 11) 2004년도에 어떤 파키스탄 노동자 2명은 무언지 모르지만 화학물질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두통이 생겨 점점 심해졌다. 그 사업장은 한국인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는데 가장 오래 근무한 노동자가 그 두 사람이었다. 유기용제 중독이 의심되어 직업병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로 보내 의뢰를 요청했다. 연구소측에서는 유기용제 중독의 의심을 가졌고 정밀검진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하루의 휴가를 얻어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불명확했다. 그러자 병원측에서는 보다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두 사람에게 정밀검사를 하자고 했지만 두 사람은 거절했다. 이미 1차 검사에서 25만원 상당의 비용을 지불한데다가 당장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몸이 아프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사례 12) 2005년도에 안산에서 태국과 중국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노말헥산’에 중독된 사례


사례 13) 2005년도, 00씨는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일하다가 4월에 허리를 다쳤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서 자비로 병원비를 자비로 부담했다. 9월에 다시 아팠는데 당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산업연수생 사후관리업체에 연락하여 귀국하라고 했다.
사례 14) 2005년도에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어떤 몽골여성은 소규모 쓰레기 재활용회사에서 일을 했다. 사업장은 먼지가 무척 많았는데,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굴 전체에 여드름이 났고 약을 발라도 낫지 않았다. 병원을 찾아가보았지만 의사는 산재라고 볼 수 없다고 하는 한편, 사업장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이 여성은 고용안정센터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해보았지만 이 사유로는 현행 사업장 변경가능 사유에 해당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 여성은 무단으로 사업장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불법체류자로서 취업하고 있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자 얼굴의 여드름은 많이 사그러들었다.


⧭ 사업장의 안전불감증
사례 15) 2004년, 어떤 파키스탄 노동자가 전화로 상담을 청해왔다. 사업장의 늘어진 전선이 바닥에 고여 있던 물에 닿으면서 파키스탄 노동자가 감전되어 그 자리에서 사망한 것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간 것을 본 사업주 역시 황망하여 어찌하여야 할지를 몰랐고, 상담소에서 사업주와 무려 2시간여 가량 통화를 하여 이후 조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업주는 산재보험처리를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이주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그 뒷수습을 어찌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사업주는 상담소에서 조언해준 대로 사체검시-본국연락-대사관 방문 등등의 제반 절차를 밟았고 유족들에게는 별도의 위로금도 지불하였다.


사례 16) 2004년, 한 방글라데시 청년이 피아노 조율과 수리를 하는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하였다. 수리가 끝난 피아노를 줄로 들어올려 옮기던 중, 줄이 끊어지면서 피아노가 청년을 덮쳤고 청년은 뇌를 다쳤다. 한국에서 1년여 정도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도 않고 하여 치료는 종결되고 청년은 장해보상금과 함께 귀국하였다.


⧭ 유해물질의 보관-관리의 소홀이 이주노동자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사례 17) 2005년, 어떤 파키스탄 노동자가 유해물질을 마시고 사망했다. 그는 공장 바닥에 놓여있던 pet병에 들어 있는 액체를 보고 음료로 여기고 마셨다. 그 pet병에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들어있었지만 pet병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 분진, 냄새 등이 심한데도 그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례 18) 2005년, 네팔인 00씨는 미세한 가루를 포장지에 담아서 운반하는 일을 했다. 가루는 질석분말과 진주석 분말 등이었는데 워낙 미세하여 먼지에 가까웠다. 작업장에는 당연히 먼지가 아주 심했고 냄새도 아주 심했다. 그 사업장에서는 마스크를 지급하기는 했지만 무용지물이었고 먼지가 눈에 들어가면서 안통이 심했다. 병원에 가보았지만 안약만 줄 뿐이었다.


사례 19) 2004, 네팔인 00씨가 일하던 회사는 플레스틱 제조회사였다. 작업과정중에 화공약품을 사용하는데 화공약품의 연기가 아주 심해 폐가 자주 아팠다. 이 사업장에서는 마스크를 지급하였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례 20)2007년, 몽골인 바타르씨는 자동차부품을 세척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중국에서 수입한 부품에 부착되어 있는 라벨 등을 떼어내기 위해 부품을 어떤 물질이 담겨 있는 통에 담갔다가 꺼내서 깨끗이 닦아낸 후,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작업은 본래 부품을 기계로 집어서 물질이 담긴 통 속에 넣었다가 꺼내야 하고, 꺼낸 부품을 닦기 위해서는 안전장갑이 필요하며,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서는 환기가 잘 되고 안전 마스크가 필요하다. 그러나 바타르씨는 일반 면장갑을 끼고 부품을 물질이 담긴 통에 담그는데, 장갑은 2-3일만 지나면 해져 버리고 물질이 손에 닿으면 따끔따끔 거려서 찬물에 손을 담구어야 할 정도이다. 그리고 페인트칠을 하는 장소는 커다란 선풍기 하나만 있고 양면은 트여 있는 공간인데 페인트 냄새가 너무 독해 머리가 아팠다. 한국에서 일을 한지 8개월여가 지나바타르씨의 손은 여기저기 껍질이 벗겨지고 부었으며, 눈은 늘 충혈되어 있고, 시력은 급격히 떨어져 가고, 식욕은 뚝 떨어지고, 두통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왜 그런 증상에 시달리는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 증상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심을 가져 주지도 않았다.